최고는 아니었던, 그러나 최고를 만든(1)

* 크루이프의 1기 드림팀은 내가 예전부터 칼럼으로 가장 다루고 싶었던 부분 중 하나였다. 그들은 과르디올라, 그리고 앞으로의 사비가 펼쳐질 미래의 기틀과 가이드를 만들어 준 존재였지만, 드림팀의 존재는 애석하게도 대한민국 웹상에 많은 자료로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부터 예전 모아 놓았던 자료와 각종 비화들의 번역을 각색, 극화시켜 그들이 언제, 그리고 왜 FC 바르셀로나의 정신과 기틀이 되었는지 남겨보도록 하겠다. 이제부터 난 크루이프의 시점에서 시대별로 엮어 시리즈로 글을 연재해볼까 한다. 이건 분명 올드팬으로서 매우 즐거운 작업이 될 것이다.

 

* 자료 출처 : 치키토(일본 블로그), 메쏘드 블로우그라나(스페인 블로그,현재 폐쇄), 엘파이스, 스포르트, 엘문도데포르티보

 

 

가스파르트 & 크루이프

 

크루이프, 크루이프, 크루이프 

 

1996년 5월 18일 아침 10시.

19일은 셀타 비고와의 홈 경기가 있었고 시즌은 2경기, 기간으로 1주일이면 종료되는 시점이었다. 크루이프는 특유의 냉정한 표정으로 깜노우 경기장에 미리 도착해 있었다. 이 날 따라 평소보다 10배나 많은 기자들이 크루이프를 둘러쌋고, 크루이프는 보기 드문 광경에 기자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다. 친분이 많던 기자 중 한명이 크루이프에게 나지막히 오늘 까탈루냐에 호외로 나간 조간 신문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내용을 듣고나서 다혈질 크루이프는 감독실로 달려갔다. 감독실에는 수석코치로 활동하던 렉사흐가 있었고 얼마 안 있자 부의장 가스파르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스파르트가 크루이프에게 악수를 청하는 순간 크루이프는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 가스파르트는 히바우두의 오버헤드킥때 손을 번쩍 들며 환호해서 항상 그 장면의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이다. 당시 성적 등으로 인해 의장으로서의 평가는 별로였지만, 확실한 건 역대 의장 중 가장 바르셀로나와 축구를 사랑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동시에 그는 20년 남짓한 바르셀로나의 부의장으로서의 기간은 전설로 불리고 있다. 당시 바르셀로나 디렉터진은 지금처럼 세부적이지가 않았으며 부의장이 경영뿐 아니라 영입과 유스 시스템등 많은 부분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능력은 누네스 의장에 가려져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디에고 마라도나, 호마리우, 호나우두, 히바우두의 계약 협상 테이블에서 그들의 설득에 성공한 장본인으로 자신만의 터프한 디렉터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 유다같은 놈"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언성이 높아지고 크루이프는 이성의 끈을 놓은듯 소리쳤다.

"왜 누네스(의장)는 내 앞에 나타나서 경질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지?"

크루이프는 배신자, 은혜를 모르는 짐승 이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하며 가스파르트 앞에서 분노했다. 처음에 온화하던 가스파르트도 점점 협박식으로 더 해가는 그의 욕설에 더 이상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요한, 너의 길은 이제 정해져 있어. 지금 이런 태도를 취한다면 난 경찰을 부를수 밖에 없을거야. 이미 너의 거취는 정해져 있어. 이젠 너는 우리의 감독이 아니다"

크루이프가 지휘봉을 잡은 기간 중 마지막 2년동안 크루이프의 드림팀은 이제 더 이상 하늘에서 놓지 못할 꿈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크루이프 입장에서는 화가 나는 타이밍이었다. 그는 맥마나만, 지네딘 지단, 라이언 긱스, 베르캄프 등의 영입 요청을 클럽에 해놓은 상태였고, 이건 클럽에게 굉장히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한참 흘러 누네스 의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기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그 영입 요청을 받았을때, 얼마만큼의 자금이 드는 것을 그가 알고는 있는지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어. 그때까지 2년간 클럽은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많은 선수를 보강했지. 하지만 모두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실패했잖아. 이제 더 이상의 실패는 용납할수 없다고 생각이 들었고, 크루이프의 계획 자체도 의심하게 되었지"

크루이프와 가스파르트의 불편한 자리에 함께 했던 감독 대행 렉사흐는 자리가 끝나자 곧 선수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통보했다. 이제 그가 남은 두 경기를 맡아야 될 상황이었다. 선수들의 표정은 여러 감정이 공존해 있었지만, 그 중 크루이프의 아들 요르디 크루이프는 모습조차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맞다, 현재 사비 사단에서 바르셀로나 영입 디렉터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요르디 크루이프가 그다)

렉사흐는 크루이프에게 전화하여 설득했다. 아버지와 아들이지만 본인의 일을 계약된 선수인 아들에게 영향이 가게 하면 되겠느냐고. 듣고 있던 크루이프는 대체감독 렉사흐에게 조건을 하나 내걸었다. 다음날 스타팅으로 요르디를 기용하여 시합 종료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내보내는 것이 그것이었다. 내가 클럽에 이루어 놓은 것 이외에 크루이프 그 이름 자체에도 자부심이 넘쳐있던 크루이프라는 인간상에 딱 어울리는 제안이기도 했다. 요르디는 자신의 아버지의 끝을 쓸쓸하게 만드려는 클럽에 분노해 있는 상태였지만, 크루이프에게 이 경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출전해야 한다고 설득당했다. 크루이프는 설득할 당시 요르디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르디, 그동안 해왔던 너의 모든 것을 보여줘. 그리고 깜노우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 지켜보면 된다"

다음날 셀타비고전, 결과는 드라마틱한 역전승이었다. 전반 일찍 2점을 내준 바르셀로나는 후반 신인티가 나는 조르디 크루이프의 정신력을 포함하여 내리 3골을 넣어 3-2로 리드하였다. 종료 5분 전 렉사흐는 약속대로 크루이프의 교체를 명령한다. 관중들의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관중들의 환호는 "요한" 도 "요르디" 도 아니었다. 자부심이 트레이드 마크인 크루이프가 바라던대로 된 것이다.

"크루이프,크루이프,크루이프"

관중들은 특정인이 아닌 크루이프 가문에게 감사의 세레머니를 보냈다. 요한 크루이프의 드림은 관중과 하나가 되어 마지막 함성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간다.


크루이프 경질 직후에 벌어진 셀타전 골 장면들

 

개혁

 

바르셀로나에서 5년동안 레전드의 선수 시절을 보낸 크루이프는 1978년에 미국으로의 이적을 결심한다. 로스엔젤레스, 워싱턴 등에서 선수 생활을 보낸 그는 뜬금없이 행한 2부리그 레반테, 그 이후 아약스로의 컴백, 라이벌 폐예노르트의 생활을 끝으로 현역 선수 생활을 은퇴한다.

말년 그의 2부 리그 생활에 대해 의아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후 크루이프의 행보를 보면 그리 이해 못할 부분은 아니었으리고 본다. 그는 이후 매니지먼트 사업을 거대하게 말아먹었지만, 축구 선수들에게 하여금 스폰서,초상권 등의 권한을 위해 사업을 시작했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의 선수 권리를 끌어올리려는 발롱도흐 출신 선수가 있다면 믿어지겠는가.

사업을 접고 아약스에 초짜 감독으로 부임한 크루이프는 선수의 식단, 식사 제공업체, 계약기간, 연봉 보너스 세부사항 등의 당시 개념이 잡혀 있지 않았던 모든 사항을 선수들을 위해서 본인이 맡아 해결했다. 그러나 그런 크루이프의 행동을 아약스 보드진이 좋게 여길리 없었다. 선수로서 위대하지만 사업적인 능력을 보여준 적도 없는 축구 감독에게 많은 권한을 넘겨 줄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크루이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밀란과 독자적인 교섭을 통해 반바스텐을 이적시키기에 이른다. 이때 이 이적 사항을 언론보다 보드진이 늦게 알았다는 것에 아약스 간부들은 분노했다.

크루이프의 이런 독단적인 아약스 생활이 가능했던건 "데 텔레그라프" 라는 크루이프파 언론이 큰 역할을 하였다. 크루이프를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기자들이 많은 이 언론사는 크루이프가 선 행동을 하면 후조치로 신속하게 언론 헤드라인으로 소식을 전했고, 이는 보드진이 크루이프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물론 그 뒤에는 언론을 조종하는 야심가 크루이프가 있었다.

아약스 하면 크루이프가 떠오르지만, 크루이프가 노년이 된 후에도 아약스와의 관계가 생각보다 그리 좋지 않았던 이유도 이런 점이 많이 작용한다.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와 물밑 접촉으로 계약을 맺고 감독직을 옮길 때에도 크루이프파 언론은 아약스 보드진보다 빨랐다. 어찌보면 언론을 처음으로 사용하고 움직인 필드 플레이어(코치)는 크루이프가 그 시초라고 보아도 좋다. 그만큼 크루이프의 영향력은 네덜란드에서 신처럼 막강했다.

그가 바르셀로나로 가려고 마음을 먹었을 시기, 절친 렉사흐는 크루이프에게 현재 바르셀로나는 마드리드에게 승점 20점차는 날 정도로 상황이 안좋다며 그의 감독 취임을 만류했다고 한다. 독불 장군 크루이프가 유일하게 귀를 기울이던 절친이었지만 이번 만큼은 크루이프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건 당시 바르셀로나의 상황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조셉 루이스 누네스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오랜 기간 장기집권한 의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78년 7월부터 2000년 7월까지 약 23년간 바르셀로나의 독재 정권마냥 이끌었다. 그러나 그가 집권한지 10년이 채 안된 1980년 중반쯤의 그의 처지는 이미 난관에 빠지고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없던 리가 우승을 달성해 냈고, 바르셀로나의 칸테라 조직(유스시스템)의 선수들을 곧잘 활용했지만 집권 기간동안 대체적인 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재정적인 상황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반 누네스파는 언제든 이 누네스라는 독불 장군을 몰아내기 위해 갖은 수를 쓰고 있었고 소시오들 중 누네스를 싫어하는 페냐(크루,지역 조직)는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누네스가 이들에게 궁지에 몰리게 된 상황은 무엇보다 누네스 본인의 공약이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가 이제 스페인을 넘어 세계 최고의 대회에서 우승 컵을 들어올리는 것을 1순위 공약으로 내세웠으며 이는 그가 부임하고 첫 라리가 우승을 이뤄낸 축하회장 기자회견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리그 우승을 계기로 우리 바르싸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스페인은 물론 유럽 속에서도 더 큰 클럽으로 인식되어 가야 한다는 뜻이다. 여태까지 우리 바르싸가 부족했던 것, 그건 하나의 시대를 제패하는 연속적인 현상이라고 봐도 좋다. 지금이야말로 세계의 정점에 서는 클럽이 될 기회가 왔다"

그에게 마침 절호의 기회가 왔다 1985-86 유로피안 결승 컵 경기에서 슈테우아 부크레슈티와 대결을 펼친 것이다. 이 경기는 세비야에서 열렸으며 아직도 "피스후안의 저주" 라고 불리우고 있다. 바르셀로나는 경기 내내 맹공을 퍼부었지만, 신은 누네스의 바램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골대를 열지 못한 바르셀로나는 동점 후 승부차기에서 우르티의 2개의 멋진 선방에도 불구, 무려 키커 4명이 페널티킥을 실축함으로서 유럽 제패의 꿈을 접어야 했다.


슈테우아-바르셀로나 유로피안컵 파이널 하이라이트

 



에스페리아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선수들

소시오들은 이때다 싶어 누네스를 공격했다. 이때는 누네스를 비난하는 것이 소시오들의 일종의 스포츠였던 분위기였다.엎친데 덮친격 필드 선수들에게도 반누네스의 사건이 따라왔다. 선수들의 초상권과 연봉에 대한 계약서를 분리해서 작성하고 있던 바르셀로나는, 연봉에 대한 계약서만 국세청에 제출하여 초상권 계약 세금 미납에 대한 죄를 선수들이 뒤집어 쓰게 된 것이다. 선수들은 에스페리아 호텔에서 모두 모여 기자회견을 가진다. 바르셀로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에스페리아에서의 반란" 이었다. 그들은 클럽 의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단체 기자회견을 가졌으며 이는 세계 축구사에서 유례없는 일이었다. 바르셀로나 구단은 즉시 성명을 내고 언론들을 통해 선수들을 잠재우려 했으나, 속보는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누네스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사건 이후 며칠 후 펼쳐진 엘 클라시코에는 6만명의 소시오만 경기를 관전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일부가 레알 마드리드의 플레이에 환호성과 박수를 보냈다. 보드진의 입장에서는 무언가의 개혁이 필요한,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거기다 반누네스파의 예비 후보들은 의장 교체의 열망에 더해, 바르셀로나 팬들의 당시 로망이었던 -아약스를 유럽 제패의 거함으로 만든- 크루이프 감독 취임이라는 카드를 다음 선거인 2년 후에 공약으로 내세울 생각이었다. 이 부분을 누네스가 모를리 없었고 소시오들을 설득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크루이프라는 존재 그 하나뿐이었다. 그는 크루이프에게 바로 전화를 걸수밖에 없었고 크루이프는 이걸 자신이 바르싸라는 팀을 좌지우지 할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선수들의 권익적 행동을 아약스에서 해왔던 크루이프의 취임은 여러 선수들의 불만을 가라앉게 만들 카드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의 앞에 있는것, 그것은 바로 바르셀로나 소시오들에게 크루이프가 영웅이라는 점이었다. 78년 깜노우에서 아약스와의 친선으로 은퇴 경기를 한 크루이프가 다시 깜노우에 돌아올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에게는 응원의 힘이었다. 누네스는 크루이프를 데려온 것이 아닌 절박한 상황으로 '모셔왔다'

크루이프가 취임했다. 그는 팀의 안좋은 분위기 상 특별한 기자회견 없이 바르셀로나의 수술에 들어갔다. 그가 누네스에 요구하는 건 역시 깊숙한 개입이었다. 그는 첫시즌 스쿼드의 9명을 제외한 10명 이상의 선수에게 칼을 대기 시작했다. 게리 리네커,알렉산코(현 바르셀로나 유스총괄디렉터),수비사레타,카레스코 등을 남기고 바케로, 치키 베거스타인(맨시티 팬들이라면 알 그 이름이다),운수에 등을 영입했으며 고이코체아를 소시에다드에서 임대 영입한다.

재미있는 건 크루이프, 과르디올라, 사비 모두 취임시 팀 사정과 스피릿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모든 바르셀로나 레전드 출신 감독 계보의 기틀이자 선구자, 크루이프의 드림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누네스와 크루이프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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