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는 아니었던, 그러나 최고를 만든(2)
- Column
- 2022. 3. 28.
시작, 첫시즌
감독으로 취임한 크루이프의 첫 작업은 축구를 스포츠 관점으로 운영되게 만드는 거였다. 가장 먼저 한 과정은 그가 축구에 있어서 외부적으로도 왜 천재라고 불리우는지 알 수 있는 작업이었다.
크루이프가 선수 시절에서 감독 생활 초기로 넘어오던 시절, 축구계에서 당연시되는 문화가 하나 있었다. 회장이나 의장 클럽 이사회의 간부들이 선수 대기실로 들어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선수들이 경기 전 옷을 갈아 입을때 들어와 오늘 경기에 대한 조언과 격려를 해주던지, 경기를 지는 날이라면 선수들을 위로한답시고 라커룸에 들어와 자신의 의견을 펼쳤다. 크루이프는 이것이 선수들에게 하등 도움이 안되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클럽의 이사회와 자신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클럽 오피스라는 개념을 바르셀로나에 도입하고 축구계의 문화로 만들었다. 지금 보면 별거 아니었지만 발상을 했다는 자체만으로 무한한 존경을 해야 하는 행보이기도 했다.
"감독에 취임하고 깨달았던 것은 클럽 수뇌부들과 선수들의 사이가 아직도 나쁘다는 거였어. 선수들은 아직 과거에 집착하는 느낌이었다(에체베리아의 반란). 분명하게 선수들에게 말했지. 그러지 말아야 한다"
선수들과 클럽의 관계를 중재한 크루이프는 클럽에게도 분명하게 자신의 요구를 전달했다. 앞으로 클럽 이사회의 어떤 누구도 선수들의 공간인 라커룸에 출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 내가 라커룸에 집착하는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던거 같아. 그들은 축구 선수가 아니었던 사람이 대부분이라 잘 모르겠지만 라커룸은 성역이어야 한다. 좋아하는 것(축구)을 말할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잖아"
두번째 작업은 선수들의 불만 제거였다. 그는 에체베리아의 반란에서 자신의 권익을 내세운 선수들이 소시오들에게 그들을 옹호하는 기사를 냈다. 모두 본인의 프리젠테이션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곧 이루어진 프리젠테이션에서 소시오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동안 거의 모든 감독은 팬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당시 상황에서 크루이프는 소시오들에게 자신의 입지를 '무려' 강요한다. 소시오가 하늘인 당시 체계에서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프리젠테이션에서 주장 알렉산코(현재 바르셀로나 디렉터이다)를 "돈밖에 모르는 도둑" 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그를 선임한건 감독인 본인이라는 말로 소시오들의 야유와 박수를 동시에 받는 진풍경을 연출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크루이프는 마냥 선수 편을 드는 감독은 아니었다. 선수들이 자신들의 권익만을 챙겨 스포츠적인 관점을 버리는 것을 또한 용납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건 보상금 문제였다.
경기 출장 수당이라는 개념이 잘 자리잡히지 않았을때, 크루이프는 이 출당 수당을 출장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지급하고 있던 현행 방식을 바르셀로나에 강하게 요구하여 수정했다. 이유야 당연히 출장하지 않아도 돈을 받아 나태해지고 자신의 실력을 올리려고 하지 않는 선수들 때문이었다. 선수들 중 두명은 그것에 강한 이의 제기를 했다. 카라스코와 알베르토가 그 주인공인데, 이 둘에게 크루이프는 합숙시설에 들어가지 말고 체벌 훈련을 하도록 지시했다. 축구를 먼저 생각해야 지금 이 팀을 살릴 수 있다고 전달하자, 훈련을 하던 둘은 크루이프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합숙소에 복귀한다.
"나는 축구 선수였다. 그래서 그들의 감정을 잘 알수 있지. 이 클럽의 선수이기도 했기 때문에 클럽에 대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만약에 이 클럽을 개선해 나가고 싶다면 지나 온 길을 제대로 바라보고 변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나의 사명은 이 클럽의 나쁜 관습들을 뜯어 고치는 거야"
그는 선수들의 계약 요구 사항을 클럽과 중재하였으며 선수들이 라커룸에서 전술과 몸 상태등을 이야기 할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절친 카를레스 렉사흐와 토니 브라인스 슬랏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스카우터. 그의 전성기 경력은 대부분 크루이프 사단에 있을 때였으며, 벵거의 스티브 로우리 같은 크루이프와는 앞으로 떼어낼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을 동시에 어시던트 코치로 임명하였다. 렉사흐와는 축구 내부의 문제 특히 클럽의 분위기와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고 하며, 슬랏과는 축구 외적인 부분인 영입과 보강 부분을 상의함으로서 앞으로의 모양새를 갖춘 것이다.
다음은 전술적인 문제, 축구에 대한 부분의 처리였다. 크루이프는 3명의 수비수를 신봉하였고 토탈 사커에 깊숙히 빠져 있는 상황이었으며 선수들이 이 패싱 게임에 바로 적응하기를 원했다. 그 방법인즉슨,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엽기적인 행태였다.
일단 크루이프는 역대 최고 금액을 경신하면서 바케로(소시에다드), 치키 베거스타인(소시에다드), 운수에(오사수나), 세르나(세비야), 알레이시오 피레스(인터나시오날), 에우제비오(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살리나스(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발 밑 좋은 다양한 포지션 영입이 이루어졌다. 이때 총 영입금액은 15M 정도. 당시 레알 마드리드가 한 시즌 평균 2-3M 유로 정도의 금액을 쓴거에 비교해보면 파격적인 것이다. 현 시대로 따지면 200M 유로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게리 리네커와 마크 휴즈가 3M 유로 정도 했다고 하니 12명의 영입 15M의 영입 자금은 어느 클럽도 사용하지 못한 금액이다. 들어온 저 선수들은 명성이 월드 클래스인 선수들은 아니었으나 1M-1.5M 유로 정도의 가격표를 단 알짜 선수들이었다. 이런 지원은 어떻게든 클럽 내 소시오들에게 인정 받아야 하는 누네스 의장의 승부수이기도 했다. (이 금액은 무려 10년이 지나 레알 마드리드가 마켈렐레를 셀타 비고에서 영입한거랑 동일 금액이다)
88년 7월 영입한 선수들을 소집해 자신의 고국 네덜란드로 전지훈련을 떠난 크루이프는 2주동안 오전에는 트레이닝 세션을 진행하고, 오후에는 바로 친선 경기를 통해 시스템을 확인했다. 스포르트紙의 회상에 따르면 이때는 바르셀로나에 소속된 모든 선수들이 실험 대상이었고 크루이프의 고함 소리만 필드에 가득 채워졌다고 한다.
7월 25일 FC BARCELONA-VARSSEVELD 6-1
7월 26일 FC BARCELONA-SWZ WIERDEN 10-0
7월 27일 FC BARCELONA-TEVV 4-0
7월 28일 FC BARCELONA-VELOC 16-0
7월 29일 FC BARCELONA-RIJNSBURGSE BOYS 2-1
7월 30일 FC BARCELONA-PEC ZWOLLE 3-0
7월 31일 FC BARCELONA-HELMOND SPORT 3-0
8월 1일 FC BARCELONA-VV LUNTEREN 1-0
8월 2일 FC BARC SPARTA DE ROTTERDAM 1-1
8월 3일 FC BARCELONA-ALCIDES MEPPEN 7-2
8월 4일 FC BARCELONA-MADESE BOYS 7-0
8월 5일 FC BARCELONA-VITESSE 2-1
8월 6일 FC BARCELONA-STANDART DE LIEJA 0-0
8월 7일 FC BARCELONA-MVV MAASTRICHT 4-4
전지훈련 이후 돌아간 스페인에서 추가로 10경기의 친선시합을 더 진행했다고 하니, 합쳐 25경기 남짓의 경기를 한달동안 뛰게 된것이다. 이 혹독한 훈련을 견뎌낸 선수들에게 그 공이 가야 마땅하리라. 그의 생각은 다른 것이 아닌 시스템에 반드시 적응해서 움직여야 했던 선수들의 기억이었다. 몸이 기억해라. 우리는 이 방식으로 이길 것이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팀으로서도, 선수의 면면으로서도 바르셀로나가 넘기 벅찬 상대였다. 리그 3연패를 기록하였고, 결국 크루이프 첫시즌도 레알 마드리드가 우승을 가져간다. 크루이프는 첫 5경기 4승 1무라는 훌륭한 성적표로 선두로 치고 올라갔지만 미첼,부트레게뇨,우고 산체스가 건재한 레알 마드리드의 승점 경쟁은 만만치 않았다. 바르셀로나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크루이프 취임 첫 엘클라시코에서 3-2로 패함으로서 시즌 종료 승점 5점 차이로 마드리드의 3연패에 2위로 들러리를 선다. 사비 감독의 첫 엘클라시코와 동일 점수인건 평행 이론이라는 건가.
그러나 수확은 있었다. 시즌 우승보다 소시오의 염원이었던 세계 대회. 컵 위너스컵(각 리그 컵대회 우승팀이 나와서 치루는 대회. 99년 흥행을 문제로 사라졌다 유에파 슈퍼컵의 전신이라고 보면 된다) 결승전에 진출한 것이다. 상대팀은 바르셀로나와 대결 인연이 있는 삼프도리아였다.
크루이프의 첫 시즌, 전술적으로 가장 큰 논란과 이슈를 가져온 것이자 파격적인 행보는 게리 리네커의 윙어 전환이었다. 바르셀로나 첫시즌 21골을 기록한 골잡이의 윙어 기용은 소시오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기 충분하였다. 그러려면 왜 비싼 금액으로 판매할수 있는 그를 팀에 굳이 남겼단 말인가. 그에 대해 크루이프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시스템은 공격적인 방향이다. 많은 선수가 상대방의 골대에 배치가 되지만 그만큼 스페이싱이 없어져서 리네커의 특유의 장점이 발휘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스피드까지 있는 그에게 공간이 많은 윙 지역으로 배치하여 거기에서 자신의 장점을 살린 공격을 기대한다"
현대 축구의 윙포워드의 시초격인 말이었다. 당시 윙어는 크로스 중심의 도움 역할로 팬들에게 인식되고 있었을때니. 그의 시도는 대박 성공은 아니었지만(이 시즌이 끝나고 쿠만과 라우드럽의 영입이 있었기에 그는 토트넘에 팔렸다) 그의 윙어 기용으로 측면의 스피드가 살아났다는 점은 크루이프 첫 시즌의 핵심 사항이다.
어쨌든 에이스이자 '코트의 신사' 게리 리네커가 역시나 오른쪽 윙어로 기용되고, 치키와 살리나스의 호흡은 물이 오른 상태였다. (크루이프 드림팀의 전술적 방향은 뒷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크루이프 첫 시즌 80득점을 해서 공격 축구가 돌아왔다 찬사를 받은 주역들이었다. 결국 이 경기는 살리나스와 교체자원 레카르테의 추가골로 2-0 승리, 크루이프 취임 첫 시즌의 출발을 명불허전이라는 말과 함께 이뤄냈다. 지역지 에스포르트에서는 크루이프에게 다음의 코멘트를 남긴다.
"아무리 경험이 뛰어난 선원들이 있어도 선원끼리 첫 대면이거나 그들에게 첫 선장이라면 배는 잘 가지 않게 된다. 모든게 잘 풀리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이 당연할 것이다. 바르셀로나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 많은 우수한 자원을 얻었다. 어쨌든간에 그들은 단 1년만에 유럽의 격조높은 대회의 타이틀을 따내고 있다. 많은 비판이 있던 첫 시즌에 선수들에게 믿음을 준 크루이프. 자신의 스타일과 시스템을 정착시킨 크루이프. 이 첫시즌은 크루이프의 혁명의 씨앗이 뿌려졌다고 말해도 좋다"
이제 크루이프 팀에게 남은 과제는 4연패를 거둔 레알 마드리드를 어떻게 넘느냐였다. 당초 5-6게임은 뒤쳐질거라 예상했던 터라 그들과 동등한 경기력을 보인 시즌이었다는 점은 앞으로의 미래를 밝게 만들었다.
라리가 제패를 노려라
크루이프가 취임한지 2년차. 바르셀로나의 보드진과 소시오가 가장 기대하는 건 당연스럽게도 라리가 제패였다. 두번째 시즌은 크루이프에게 있어서 시험대가 될 수 있는 시즌이기도 했지만, 더 재미있는건 이 시즌은 여러모로 그의 운명이 갈린 시즌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드림팀이라는 것이 이 시즌으로 인해 우리의 기억 속에 없는 단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리네커가 토트넘에 판매된 뒤, 크루이프는 크랙을 찾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남들이 주목하지 못한 한명의 젊은 선수가 눈에 들어왔고 크루이프는 어시던트인 슬롯에게 그의 자세한 정보를 요청했다. 18세에 덴마크 대표로 데뷔한 자국 천재의 느낌, 그는 유벤투스와 계약했지만 외국인 제한에서 밀려 2년간 라치오로 임대되었다. 크루이프는 그가 많이 뛰지 않을때부터 게리 리네커의 대체자로 점찍었다고 한다. 2억 2천만 페세타 (1.1M 파운드)의 저렴한 이적료로 온 이 유망주가 크루이프와 드림팀의 운명을 바꿔줄 것임을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선 팬들은 그의 영입을 아예 기대하지 않았다. 리네커의 골 감각에 익숙해져 있던 꾸레들은 그의 영입이 그리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클럽의 부의장은 칼치오에서도 안통하는 선수가 이쪽에 와서 뭐가 되겠냐고 크루이프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크루이프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그에게 느꼈던 확신을 거두지 않았다. 바르셀로나는 지금 골을 넣는 선수보다 경기를 총체적으로 플레이메이킹 할 수 있는 선수가 필요하다. 이것이 크루이프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시스템에 걸맞는 선수였다. 당시 세리에는 이미지대로 수비수가 전부요, 극단적 카테나치오가 승부인 리그였다. 자신의 전부를 꺼내들지 못했던 한 젊은 선수가 바르셀로나에서는 9번을 달고 현재의 '펄스 나인' 같이 자유로운 플레이를 펼쳤다.
"축구라는걸 즐길수 있구나 드디어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즐겁게 플레이 해본적은 없다. 여기서는 공격적인 축구가 사랑받고 무엇보다 자유롭게 플레이 할 수 있다는 점이 기쁘다"
라우드럽은 이 한마디에서 드러나듯 그 누구보다 바르셀로나에, 아니 크루이프이즘에 가장 알맞은 옷이었다.
두번째 영입은 쿠만이었다. 그는 라우드럽의 딱 5배의 금액으로 바르셀로나에 입성했다. 아약스의 수비수로서 라이벌 PSV로 이적한 그는 유로피안 컵에서 우승한 직후 몸값이 상당히 뛰어있는 상태였으며 바르셀로나 입장에서는 무리해서 영입할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팬들은 수비수의 너무 비싼 몸값에 회의감을 느꼈다. 쿠만은 당시 레알 마드리드와 동시 오퍼가 왔었지만 한치의 망설임 없이 바르셀로나를 선택했었다고 밝혔다. 크루이프의 전술이 아약스와 PSV와의 전술, 자신의 수비수로서의 장점을 활용하기에 훨씬 나았기 때문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힌다.
플레이메이킹과 더불어 크루이프가 현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부족하다고 느낀 것은 수비수로부터 정확히 전달되는 긴 롱패스 부재였다. 각종 주장을 맡으며 검증된 리더쉽을 보여준 쿠만은 크루이프가 전술적 시스템을 목적으로 가장 비싸게 산 수비수 중 하나였다. 그의 헤더 능력과 강한 킥력, 정확하고 똑똑한 패스는 이미 스카우터들에게 정평이 나있었다. 크루이프는 쿠만을 피보테로도 활용할 생각이었다.
팬들은 늘 그래왔지만 냉정했다. 그들은 크루이프가 감독 취임할때만 해도 그의 취임 그의 존재만으로 열광했었다. 그러나 두번째 시즌은 사정이 달라졌다. 굉장히 간사한 느낌으로 위너스컵보다 숙적 레알 마드리드를 이기고 리그 제패를 하기를 원했다.
크루이프의 둘째 시즌은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바야돌리드에게 2-0 충격패로 시즌을 시작한 바르셀로나는 알라베스와의 원정 경기에서도 2-0 패배를 당한다. 특히 바야돌리드 전에서 팀의 연습에도 참가한적이 없던 헤수스 루센도라는 선수를 B팀에서 콜업해 사용한다. 물론 이런 크루이프만의 칸테라 방식이 결국 승리하게 되지만, 팬들은 어떻겠는가. 패배의 원흉을 크루이프로 몰고 갔고, 삐딱선을 타던 언론은 크루이프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언론이 그를 좋아했던 유일한 한가지는 흥행성이었다. 그는 선수의 비판을 무조건 기자들이 있는 프레스에서 하곤 했다. 따로 면담을 하지를 않고 기자들의 입을 빌려 보드진과 선수들 심지어 팬들까지 저격하는 언론 공격을 시도한다. 어쩌면 그 끝모를 자부심이 결국은 대업을 이룩하지만, 그 과정의 잡음을 피할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거다. 팬들에게는 그저 크루이프가 자신의 무능을 덮기 위해 선수를 이용하는거라 느꼈다. 마드리드와 1월에 10점, 2월에 7점의 차이로 뒤지고 우승은 거의 멀어지고 있었다.
보드진은 클럽 긴급회의를 결정했다. 놀랍게도 크루이프 사임이 그 주제였다. 크루이프의 1년차는 적응의 기간으로 소시오들이 인정할수 있지만, 2년차까지 선수와 시스템의 시험을 하는 것에 팬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유로피안은 이미 탈락했고 리그는 레알 마드리드와 발렌시아에 밀려 3위로 마감했다. 그러나 의장 누네스는 완강했다. 그가 집권을 위해 꺼내든 카드인 크루이프를 옹호 안한다면 누가 그를 옹호해 주겠는가. 의제는 결국 이사회에서 부결되고 만다.
팬들에게 가장 분한건 우고 산체스, 부트레가뇨, 바스케스, 미첼이 전성기를 맞은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배감을 계속 맛본다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기적같이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이 엘 클라시코로 성사된다.
팬들이 가끔 감독들에게 쓰는 표현인 "생명 연장" 이 이 경기에 달렸다.
크루이프는 분명 펄스 나인을 사용한 적이 있다. 그땐 아예 개념이 잡히지 않았던 역할이지만, 라우드럽의 당시 플레이가 바케로보다 한참 밑으로 내려온 적이 많았다는 점이 그를 증명한다. 이 경기는 바르셀로나의 현지 노인 팬분들에게 절대 잊혀지지 않는 경기가 될 것이다. 아직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는 서로를 증오하고 멸시하던 때다.
경기는 의외로 다른 방향에서 갈렸다. 에이스 우고 산체스는 알로이시오를 부상 시킨 이후 또 한번의 반칙으로 퇴장을 당했다. 10대 11의 싸움으로 바르셀로나는 후반 살리나스와 아모르, 두 바르셀로나의 상징같은 선수들의 골로 토샤크의 레알 마드리드를 누르고 코파 델 레이에서 최고 팀임을 입증한다. 더불어 크루이프를 보기 위해 산 하이메 광장에는 팬들의 환호성이 넘쳐났다. 언제 그랬냐는듯한 온도 차이는 역시 레알 마드리드를 이겼기 때문이었다. 만약 코파 델 레이 우승을 하지 못했다면, 우승을 했더라도 레알 마드리드를 결승에서 만나지 못했더라면 크루이프의 운명은 어떻게 됐었을까.
레알 마드리드의 주장 첸도(미구엘 포를란 노게이라)는 이 경기가 끝난 후 분노를 표시했다.
"이 영예로운 코파 델 레이 대회가 스페인도 아닌 팀이 가져가서 엄청나게 분하다"
반면 크루이프에게는 가슴을 쓸어내릴만한 운명의 한판이었다. 취임하고 2년간 팬들의 염원인 라리가 트로피를 못들었던 그의 반쪽짜리 영광도 그에게도 팬에게도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의 곁에 열정적인 수비 플레이를 만든 쿠만과 플레이메이킹 포워드의 창시격인 라우드럽의 존재가 없었다면 우리 기억 속에 크루이프는 영원히 없었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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