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는 아니었던, 그러나 최고를 만든(3)
- Column
- 2022. 4. 4.
동유럽의 새끼사자
크루이프의 3년차는 아마 크루이프의 감독 생활에서 가장 많은 성과와 사건이 일어난 1년이 될 것이다. 3년차인 1990-1991 시즌은 한시즌 전, 유에파 컵 위너스컵의 강렬한 인상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준우승의 여운이 아닌, 바로 4강전에 상대팀으로 만난 한명의 사자같은 선수 때문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최고의 레전드로 꼽히지는 않지만, 그 누구도 따라할수 없는 레전드로 입에 오르내리는 괴팍한 한 소년의 이름, 그는 바로 '스토이치코프'
풀네임은 반복이 들어가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스토이치코프(Hristo Stoichkov Stoichkov). 그는 드리블을 크게 치고 스피드로 뒷공간을 파고 들며 몸싸움이 거친 선수였지만,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발 밑이 매우 좋은 선수기도 했다. 그가 바르셀로나와의 컵 4강전에서 넣은 두골도 바르셀로나가 반드시 가져야 되는, 강과 약의 조절을 할줄 아는 그런 킥력, 그리고 투박하지만 상대를 찢는 드리블 능력이 보이는 그것이었다. 방향은 좀 다르지만 과르디올라가 먼 훗날 즐라탄을 영입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했듯이, 크루이프의 요구도 이 선수만 영입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 시즌은 정말 스토이치코프 이외에는 돈을 지불한 영입이 없었다). 어쩌면 과르디올라는 이때의 크루이프의 영입 방향에 내외부 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을 확률이 높다. 그를 영입한 이유는 크루이프가 훗날 기자들에게 한 그의 평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금 우리 팀에 소속된 선수들을 보면, 축구 선수로서 인간적으로 잘 형성된 선수들이 많아. 좋은 선수와 누구에게나 선호되는 무난한 성격을 가진 선수만으로는 팀이 잘 될수 없다. 그 선수, 그런 선수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바로 흐리스토였어. 생각하지 않고 키퍼에게 공을 몰고 달려가는 선수. 보통의 좋은 선수들은 그런 것을 할때 많은 생각들을 한다. 하지만 흐리스토는 상대 골문에 돌진을 하거나, 슛하는 것이 전부인 선수다"
3년차 감독은 급박한 이때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어느 때보다 자신이 넘쳤다. 스토이치코프는 우고 산체스와 더불어 유럽 최고의 득점(38골)을 기록한 24살이 패기 넘치는 새끼 사자였다. 그의 소속팀 CSKA 소피아는 동유럽답게 불가리아 군부 산하에 있는 클럽이었고 (우리로 따지면 상무라고 보면 된다) 그의 영입 역시 불가리아 국방 사무실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크루이프 사단 3년차의 언론의 예상은 냉혹했다. 레알 마드리드의 단단한 전력, 그에 따른 성과인 4연패의 아성을 넘으리라 지역 언론조차 예상하지 않았다. 3년차 시즌이 시작되었지만, 언론의 저주 때문인지는 몰라도 징조는 안좋았다. 언론의 헤드라인은 "많은 선수들이 바르셀로나를 떠나고 싶다고 보드진에 요청했다" 였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크루이프가 자신들을 너무 가혹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그가 미디어를 이용해 선수를 소위 씹는,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관계에서 신뢰를 잃게 행동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런 분위기를 통해 바르셀로나 내부는 후세에 그들이 듣게 되는 '드림팀'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무너져가고 있었다. 로버트 페르난데스는 크루이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발렌시아에 입단하였고, 루이스 미야는 계약이 종료되고 크루이프의 얼굴은 다시 보기 싫다며 무려 레알 마드리드와 자유 계약을 맺었다. 알리오시오는 크루이프가 중앙 수비수인 자신을 자꾸 윙백으로 돌리는 것이 못마땅했고 포르투갈 리그의 명문 포르투로 합류했다.
크루이프는 아까 말했듯이 오히려 여유가 넘쳤고, 그들의 자세에 전혀 동요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프레스에 앉아 기자들에게 단순 명료하게 자신의 생각을 풀었다.
"팀 컬러를 받아들이지 않는 선수는 바르셀로나에 필요없어. 만약 나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다면 언제든지 방출할 준비가 되어있다"
추후 아들 요르디 크루이프의 증언에 따르면 크루이프에게는 두가지의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두번의 우승을 놓친 이 상황에서 아버지는 준우승이 이유가 된, 열정이 없는 선수들을 내치고 싶었던 것. 둘째는 바르셀로나의 칸테라(유스) 조직에 이미 많은 선수들을 기용할 생각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나는 다 계획이 있어라는 느낌. 크루이프는 신속했다. 프리시즌에는 카를레스 부스케츠(세르히오의 아버지), 알베르트 페레르, 주안 카를로스, 세바스티안 에레아, 펩 과르디올라가 연습에 합류했다. 그들은 크루이프에게 앞으로 팀의 조직을 구성함에 있어 충분히 미래가 될만한 선수들이었다. 장기 집권한 누네스의 첫 공약은 세계 제패였으며, 두번째 공약은 칸테라를 완성하여 많은 선수들이 1군으로 뛰는 팀을 만든다는 것이었고 적임자 크루이프는 이미 그 작업을 3시즌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바르셀로나는 유스 출신들이 떠나면 망하고 그들이 활약하면 크게 성공한다' 라는 첫 공식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고난을 이겨낸 타이틀, 그러나
라리가가 스타트했다. 출발은 당초 예상을 깨고 '이보다 더 좋을수 없다'
빌바오전 승리로 리그 개막 이후 6연승을 기록했지만 악운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9라운드에 수비의 기둥 쿠만이 5개월 장기 발목 부상을 당한 것이다. 더해 라이트 백으로 시즌 초 기대를 한몸에 받던, 유스 출신의 라이징스타 페레르까지 부상을 당하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공백을 느껴야 했던건 쿠만의 이탈이었다. 자신을 적대시여겨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버린 루이스 미야의 공백은 아무래도 컷다. 재미있는건 현재 라포르타가 내세우고 있는 클럽을 사랑하지 않는 연봉 협상은 이루어질수 없다는 자세는 이때 크루이프가 먼저 시작했다는 것이다. 크루이프는 루이스 미야의 턱없이 높게 부르는 연봉에 팀 컬러보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경우로, 벤치로 내려앉히고 그를 출전시키지 않았다.
사실 시즌 전 누네스 의장은 스토이치코프 외에 영입 선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었다. 크루이프에게는 4번 선수(수비형 미드필더)가 부재인 것이 어린 아이의 눈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 않는가. 리버풀의 레전드 "얀 몰비"의 영입을 하자고 했지만 크루이프는 그가 바르셀로나 컬러(지금은 DNA로 불린다)에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그가 와서 잘 하지 못한다면 영입 전권을 가진 감독 자신이 책임을 질수 밖에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크루이프가 거절하지 않았다면 몰비는 리버풀의 레전드 소리를 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선수간 협상은 되었다는 언론 보도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롱볼 패싱 위주의 그의 스타일은 바르셀로나에 와서 잘 될수 있을거라 확신이 들지 않았을 것. 크루이프의 자신감은 1옵션 아모르의 비상 선수로서 눈여겨 보고 있는 B팀의 펩 과르디올라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다. 이 시즌 아모르의 건강함을 이유로 펩 과르디올라는 많은 출장을 하지 못했지만, 어린 소년의 공을 다루는 능력 번뜩이는 센스는 크루이프의 눈에 바르셀로나 피보테,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는 실제로 이 시즌 B팀 과르디올라를 훈련에 가장 많이 소집시켰다.
작년 코파델레이 엘클라시코 승리의 기쁨과 팬들의 환호로 여운이 남아서였을까. 바르셀로나는 리그 19라운드 레알 마드리드 전까지 13승 3무 2패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들의 전반기는 팬들의 자세를 바꾸었다. 크루이프를 연호하는 팬들은 매번 관중석을 만원을 만들었다. 작년과 재작년, 패배감의 소시오들은 4만명 남짓의 홈구장 방문으로 바르셀로나의 위상과 어울리지 않는 응원전을 펼쳤었다. 9만명의 그들이 다시 경기장을 찾게 된것은 단 하나의 이유였다. 축구가 재미있다. 스펙터클하다.
하늘은 왜 크루이프에게 무난한 미션을 주지 않았는가. 19라운드 레알 마드리드와의 엘클라시코를 앞두고, 바르셀로나에 또 다른 악재가 터졌다. 핵심 선수 두명의 부상에 이어, 스토이치코프의 말썽이 그 원인이었다. 이때까지 12월에 개최되던 수페르코파(스페인 슈퍼컵-전년도 리그 우승자와 코파델레이 우승팀이 단판제로 승부를 내는 대회)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눈을 의심케 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날 엘클라시코는 굉장히 격렬한 분위기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프타임이 끝난 직후 감독 크루이프가 심판에게 다가가 전반전 차별적인 운영에 운을 띄었고 다혈질인 그는 격렬한 항의로 퇴장을 당했다. 옆에 있던 스토이치코프는 덩달아 옐로카드를 받았는데, 이에 격분하고 바스크 국적의 심판 아스피타르테의 발을 밟아버린 것이다. 스토이치코프는 이후 리가협회에서의 재심 결과에서 무려 6개월 출장정지를 받게 된다. 그때의 엘클라시코는 그런 항의의 분위기가 도를 지나치다 싶다 할 정도로 많이 보이고 있기도 하다. 이후 언론은 까탈루냐에 대한 차별로 일로 키워 한참동안 시끄러웠던 이 사건은 1-0의 패배와는 상관없이 다른 감정 싸움으로 퍼져 있었고 세계 최고의 더비라고 불리우는 열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슈퍼컵의 논란이 식지 않은 시기, 한달만에 라리가 19라운드가 1991년 1월, 엘클라시코로 다시 열렸다. 어쨌든 이번 시즌 절반을 마무리 짓는 엘클라시코 무대가 시작된 것이다. 쿠만과 스토이치코프, 페레르가 빠진 채 큰 경기를 맞은 바르셀로나는 마드리드에 완전히 열세인 전력으로 버겁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는 이전 시즌과는 다른 팀이 되어 있었다. 팀을 잘 알고 있는 잔류 선수들, 3-3-1-3 시스템으로 2년을 버텨온 그들은 마드리드의 공세를 막으면서도 공격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좌우 측면 공간을 내고 크로스를 열심히 올리던 바르셀로나는 임대후 완전 영입된 고이코체아의 왼쪽에서의 다이렉트 크로스를 중앙에서 달려들어오던 라우드럽이 바이시클킥으로 원더골을 만들어내며 레알 마드리드에게 신승을 거둔다. 14승 3무 2패로 전반기 19경기를 마친 바르셀로나는 이미 우승에 한발짝 다가와 있었고, 후반기에는 이 점수를 유지하는 것으로 목표를 세워야 했다.
그러나 크루이프의 악재가 또 자리하고 있엇다. 크루이프가 엘클라시코 이후 한달도 채 되지 않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것이다. 산조르디 병원으로 급속히 후송된 크루이프는 수술과 수혈이 빠른 덕분에 기사 회생으로 살아날수 있었다. 수술은 대성공으로 발표되었다. 의사는 크루이프가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이 났을거라며 안도했다. 크루이프의 아버지, 할아버지 모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었기 때문에 팀에서는 그에게 회복에만 전념하라 지시했다. 후반기 2개월 넘게 크루이프는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고, 전술 어시던트 렉사흐가 나머지 경기를 지휘했다. 그러나 이미 전반기에 벌어진 점수차는 후반기에 유지되며 크루이프가 부임한 뒤 처음으로 리그 우승컵을 손에 들었다. 2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10점 차이. 당시 승리에 대한 승점은 지금과 같이 3점이 아닌 2점이었다. 현대 라리가로 치면 15점 차이의 넉넉한 우승을 거머쥔 것이다. 그의 우승은 많은 주축 선수들의 이탈로 불가능해 보였으나, 크루이프 특유의 결단력과 고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의 감독 생활에 청신호라고도 할 수 있었다. 팬들은 그동안의 설움을 벗겨내기라도 하듯이, 거리로 몰려나와 이틀간 축제를 벌였다.
그러나 그 중 가장 표정이 좋지 않았던건 크루이프였다. 컵 위너스컵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전에서 두번째 결승전 패배를 기록한 것이 이유였다. 팬들은 이미 놀자 판이었지만, 크루이프는 언론을 이용하여 선수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날린다.
"우리 팀의 기본적인 문제는 너무나 명확해. 이 중요한 결승전을 앞두고 리그 우승에 심취해 모두 기강이 해이해져 있었던 것 말이야. 무언가에 만족하는 것, 그것에 너무 큰 문제가 있다. 마드리드를 이겼다는 리그 우승에 모든 선수들이 만족해버렸고, 컵대회는 어떻게 되던 말던 하는 선수의 분위기도 있었다"
크루이프의 드림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의 팀이 전설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 기자회견에 전부 담겨져 있었다.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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