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는 아니었던, 그러나 최고를 만든(4)

 

"우리는 이 스타일로 5개의 챔피언스리그 트로피를 얻었습니다. 이건 모두 요한 크루이프가 만든 것이죠. 결실을 맺고 또 맺었습니다. 개선이 필요하지만,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바꿔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게임을 한번 지고 타이틀을 잃는다고 해서 우리의 DNA를 바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2022년 4월, 이 글을 작성하기 몇시간 전, 유로파리그 8강인 프랑크푸르트전에서 패해 토너먼트를 탈락한 초짜 감독 사비가 인터뷰석에 나와 단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크루이프의 축구에 대한 포메이션과 기술적 움직임도 포함 되었겠지만,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이미 좋다고 생각한 방식의 무한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그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고집이다. 크루이프 역시 바르셀로나에 취임 후 2년동안 자신의 방식을 심고 뚝심 있게 철학을 심었다. 그는 분명 트로피가 없는 첫 2년동안 팬들의 비판을 받았으나 사비 감독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네덜란드에서 정립한 그만이 할 수 있는 축구의 고찰은 이미 "드림팀"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요건이었다. 3년차에 첫 리가 우승을 기록했던 크루이프의 가장 큰 결실은 바로 4년차, 91-92 시즌임에 모든 전문가들은 동의 할 것이다. 그는 첫 프레스에 매우 초췌한 모습으로 나와 있었다. 작년 라스 팔마스와의 컵대회를 이틀 앞둔 휴식시간, 아내와 쇼핑을 갔다가 몸을 부여잡고 쓰러진 뒤(3편 참조), 애호하던 담배도 끊었다.

 

"작년 우승으로 만족할수 없어. 우리가 가지는 현재 노선을 그대로 가져갈 것이다. 우리 모두 한순간도 물러서면 안된다"

 

그의 오른팔이자 수석코치 카를로스 렉사흐도 이번 시즌 출사표에서 그의 감상을 말한다.

 

"트로피 우승은 마치 해방하고 같았지. 우리는 그들(마드리드)의 역사적인 숙명론을 물리쳤다. 우리가 망하기를 기대한 사람들은 많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4년차에 물론, 아약스의 테크니션 미드필더 리하르트 비츠셔를 여러 타팀간의 경쟁 끝에 영입했고 세라 페레르 감독이 이끌고 있던 마요르카에서 미구엘 앙헬 나달, 후에 레전드가 된 수비수를 영입했으나 그는 4년차에도 이적 시장에서 조용했다. 여기서 크루이프는 그가 생전에 남긴 가장 유명한 말 중 하나를 남긴다.

 

"왜 우리보다 더 부유한 클럽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한푼의 돈이 득점을 하는 것을 본적이 없어"

 

크루이프의 4번째 시즌은 크루이프가 드림팀이라고 불리우게 된 첫 시즌이자, 경기력 측면에서도 크루이프 시절 중 가장 강력했던 시즌이라고 전문가들은 평하고 있다. 펩 과르디올라 역시 데뷔 시즌의 경기력이 상당했듯이, 아직 크루이프의 완성된 쓰리백을 적응하지 못한 상대 팀들이 드디어 여러 시즌을 거쳐 고착된 티키타카에 사정 없이 무너졌던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거금으로 팀을 조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던 크루이프, 물론 그는 첫 시즌에 상당한 금액을 팀에 투자했지만 영입에서 슈퍼스타급이라고 표현할 만한 선수는 없었으며 그 금액 역시 자신의 철학을 구현할 10명 이상의 방출이었기에 지금까지만 봤을때 크루이프의 저 말은 허언이라 표현하기 힘들다.

 

크루이프의 드림팀에는 여러 선수들이 거쳐갔지만, 그의 축구에 멘탈리티를 심어주고 철학을 유지되게 만드는 분위기를 창조한 4명의 선수가 있다. 한명은 이미 소개한 로날드 쿠만이었고, 나머지 세명은 크루이프 시절 영입이 아닌, 바르셀로나에 이미 있었거나, 바르셀로나의 칸테라 조직을 통해 올라온 선수들이었다. 한명은 마치 크루이프 감독과 같이 감정없는 표정 관리가 꼭 닮은, 볼보이 출신의 축구를 사랑하는 한 소년이었으며, 나머지 두명은 바스크에서 넘어와 선수 조직에 열정을 심어준 리더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크루이프를 믿고 따랐으며 그의 철학이 팀원들에게 전달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볼보이 과르디올라는 까탈루냐와 FC 바르셀로나에 미쳐 사는 아이였다.

 

세계 대회 우승을 이뤄낸 리더들

 

까탈루냐의 몬세라트의 산 주변에 작고 조용한 한 마을이 있다. 바르셀로나에서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졸음을 초대하는 마을'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산트페도르에서 태어난 (과르디올라가 골프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 고향처럼 자연에서 플레이 할 수 있다고 말을 한적이 있다) 펩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가 첫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한 시즌 카디스와의 리그 경기에서 데뷔 경기를 치룬다. 그는 바르셀로나 팀을 그 누구보다 사랑한 로컬 보이였던만큼, 감격에 젖은 소회를 꺼낸다.

 

"라마시아에서는 인생 최고의 시절을 보냈다. 바르셀로나의 퍼스트팀의 일원으로 플레이 한다는 것, 심플하지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꿈을 향해 모두를 따르는 나날이었지. 라마시아에서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요청하면 자주 이런 예를 들고는 한다. 나는 매일 밤 침대에 들어갈 때 자신에게 물었다고. 지금부터 자는 대신 일어나서, 공을 가지고 플레이 할 수 있을까. 만약 '노'라는 대답을 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축구 말고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3세에 마시아에 합숙으로 들어온 펩의 일상 생활은 깜노우와 함께였다. 오전에는 깜노우 바로 옆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오후에는 바로 옆의 그라운드에서 연습에 몰입했다. 바르셀로나가 경기를 할 때면 볼 보이에 지원하여 들어갔으며, 자유 시간에는 깜노우가 보이는 숙소의 창가에서 독서를 하곤 했다. 까탈루냐의 시집을 사서 섭렵하고, 까탈루냐의 음악이 아니면 듣지 않는 지독한 로컬보이의 생활을 지내왔던 것이다. 그는 볼보이를 하던 시절에도 여러번 그라운드를 난입하여 어린 시절이 언론에 사진으로 생생히 남아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당시 바르셀로나의 볼보이는 그라운드로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클럽이 규정이 있었음에도). 이후 그가 바르셀로나의 리더가 될 수 있던 것은 이런 바르셀로나를 광적으로 아끼고 사랑한 그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동료들은 증언한다.

 

완벽주의자 성격의 과르디올라를 기묘한 운명처럼 눈여겨보던 크루이프는, 그가 클럽의 기둥이 되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채고 있었다. 1년 전, 쿠만이 장기 부상을 당했을때 (3편 참조) 크루이프는 과르디올라를 훈련 세션에 자주 소환했으나 그가 비집고 들어 갈 틈은 없었다. 쿠만이 피보테로 플레이했으며 멀티성이 짙은 아모르가 건재했고, 루이스 미야가 아직 바르셀로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피지컬이 딸려서 감독들이 외면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단지 1군에 바르셀로나의 좋은 4번 선수가 가득했을뿐.) 크루이프의 3년차, 미야가 마드리드로 이적하고 쿠만이 중앙 수비수 자리로 낙점되면서 과르디올라에게 기회가 생겼다. 카디스전에서 아모르가 경고 누적으로 한 경기를 쉬어야 했던 것. 크루이프는 이미 그 전부터 과르디올라를 기용해 보려고 노려왔던 터였다. 데뷔전을 치른 직후 과르디올라는 어린 선수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냉정한 표정으로 이렇게 인터뷰한다.

 

"상황이 나의 편이었다. 미야는 더 이상 없고, 쿠만은 부상이었고 아모르가 카드 떄문에 출전하지 못해서 나한테 기회가 온 것이지. 나는 오랜 기간 라 마시아에서 생활하고 있다. 많은 동료들이 이런 기회가 돌아오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다. 경기에 출전할수 있을지 없을지는, 혹은 그런 기회가 찾아올지 아닐지는 종이 한장 차이의 행운으로 정해져 버린다는 걸 라마시아에서 배웠지. 그러한 행운에 감사함과 동시에, 나를 믿고 기회를 준 감독에게도 감사드린다. 감독이 나를 믿지 않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회가 오지 않으니까 말이야"

 

호세 라몬 알렉산코 ( José Ramón Alexanko)

 

까탈루냐의 깊숙한 애정과 그에 따른 충성심으로 어린 나이에도 이미 조직의 리더가 되고 있던 과르디올라지만, 로컬 보이가 아니어도 로컬 보이 몫지 않은 선수들도 바르셀로나에 이미 존재했다. 바로 바스크 출신의 라몬 알렉스코, 현재는 바르셀로나의 유스 총괄 디렉터를 맡고 있는 당시의 캡틴이었다. 과르디올라 감독 시절, 그에게 푸욜이 있었듯이, 크루이프의 기반에는 알렉산코가 초기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56년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난 알렉산코는 이미 바르셀로나로 이적 당시에도 저렴한 가격의 선수가 아니었다. 서서 고묘하게 상대를 농락하는 태클링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주무기였으며 공중볼이 좋고 투쟁심이 갖춰진 선수였다. 빌드업시 들어가는 롱 패스는 크루이프의 중앙 수비수 덕목에 딱 맞아 떨어지는 능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크루이프가 그를 팀의 중심으로 생각한건 그의 축구적인 능력이 아닌, 그가 가진 기질과 성향 때문이었다. 그는 80년 여름에 바르셀로나에 이적했는데, 무려 8명의 감독 교체를 경험했다. 에레라, 우도라텍, 호세 로메로, 세자르 메노티, 베나블레스, 아라고네스, 렉사흐 감독대행, 그리고 크루이프까지. 그는 한명도 빠짐없이 8명의 감독에게 주장으로 낙점받았다. 라커룸을 한 방향으로 끌어내는 능력이 있었으며, 어려울때 팀원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훌륭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모든 의미에서 선수들 사이에 보스였어. 그것도 상황이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필요한 진짜 보스였지. 감독으로서 그에 대한 입장을 말하는 것이 이상할수도 있지만, 선수들에게는 알렉산코의 구멍을 채우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오죽하면 그가 떠난 날, 오만한 크루이프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겠는가. 그의 존재는 크루이프에게 있어서 그리고 드림팀이 유지될 수 있었던 핵심적 사항이었다. 

 

에스페이라의 반란 (1편 참조) 에서 살아남은 선수는 딱 두명이었다. 당시 부의장인 가스파라트의 여론 장악으로 인해서 선수들의 권익보다는 이례적인 보드진을 향한 공모 조작으로 포장이 되었고, 팀에서는 이 선수들을 반란군으로 낙인 찍고 타 팀에 판매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중, 팀이 차마 판매를 하지 못한 선수가 두 명이 있었다. 바르셀로나 내 영향력이 지대하여 그들이 나가면 팀의 케미스트리가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명은 위에 이야기 한 알렉산코였고, 또 한명은 같은 바스크인이었던 안도니 수비사레타였다.

 

안도니 수비사레타 (Andoni Zubizarreta)

 

현재 진행형이지만, 이상하게 스페인에서는 바스크 혈통의 선수 중 좋은 골키퍼가 많이 배출이 되었다. 일부 언론에서 희안한 징크스라고 많이 표현 할 만큼 바스크는 골키퍼들의 토양이었고, 까탈루냐 출신 중 미드필더가 많이 배출된 것과 마찬가지로 바스크 출신의 골키퍼가 당시 스페인 축구를 주도하고 있었다. 수비사레타는 아슬레틱 빌바오 시절 스페인이 낳은 최고의 키퍼라고 칭해졌던 호세 앙헬 이리바르를 벤치로 내몰았으며, 스페인 대표팀에서는 부동으로 여겨졌던 알코나다를 역시 후보 선수로 만들어버렸다. 바르셀로나에서도 역시 반사신경이 좋았던 우르티를 벤치 신세로 만든다. 수비사레타가 몰아낸 이 세명은 모두 바스크인이었으며, 수비사레타 역시 바스크인이었던 것을 보면, 바스크는 당시 골키퍼의 천국으로 불리울수 밖에 설명이 안되지 않는가. 수비사레타는 화려한 플레이를 기반으로 한 골키퍼가 아니었다. 그의 하이라이트를 보면 야신처럼 못 막을 구역에 대한 다이빙이나 1대1 상황에서의 기가막힌 태클링은 다른 골키퍼들보다 훨씬 적은 편이다. 그의 강점은 미리 공이 어느 지역으로 올지 미리 아는 본능적인 포지셔닝이었으며, 이 포지셔닝은 쓰리백 지역의 수비 선수들의 포지셔닝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흔히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단어인 수비 조율이다. 이런 천부적인 능력으로 그는 스페인에서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알렉산코가 라커룸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호통을 치고 선수들의 기합을 잡아주는 열정맨이었다면, 수비사레타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선수들을 다독였고 이 둘은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 초기, 주장과 부주장을 맡아 바르셀로나 선수들을 리드했다. 바르셀로나의 경기를 볼만하게 한 것은 라우드럽, 스토이치코프, 쿠만등의 크랙들이 화려하게 볼을 다룬 것이기는 했지만, 결국 드림팀의 초석을 만든 건 세대를 아우르고 라커룸을 주도했던, 리더의 성격을 가진 이 세명의 역할이 컷다고 볼 수 있다. (과르디올라는 자신도 많이 어렸기 때문에 당시 칸테라의 어린 선수들에게 힘을 많이 줬다고 전해진다).

 

결국 크루이프는 아모르, 과르디올라, 페레이라 등의 라 마시아 선수들과 바케로, 치키, 고이코체아, 알렉산코, 수비사레타의 바스크 선수들 그리고 쿠만, 스토이치코프, 라우드럽 같은 크랙 선수들의 트라이앵글 구도로 라커룸을 운영하여 세계 우승의 초석을 다졌다고 보면 되고 그 조합이 가능했던 것은 바르셀로나와 바스크 등 스페인 풍토에 어울리고 적응이 완비된 조직들이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크루이프는 실제 보드진에게 5년마다 오는 칸테라의 사이클을 이루어낸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고, 실제로 그는 3-4년차 정도에 칸테라의 재능들을 선별하기 시작한다.

 

단순히 크루이프는 선수들만 잘 다루는 감독이 아니었다. 그가 위대한 감독으로 아직도 칭송받는 이유는 경기 내외적으로 완벽을 추구했기 때문인데, 그가 창조한 트레이닝을 보면 그가 축구 내적으로도 얼마나 똑똑한 선구자였는지 이해 할 수 있다. 단순히 바르셀로나 축구가 개성이 있구나 정도로만 바라보기에는 아까운 측면이 있는 트레이닝 비법이었다.

 

 

 

론도에 참여하고 있는 크루이프

 

묘한 트레이닝의 창시자

 

점유율이라는 단어는 이제 축구 팬들에게 마저도 익숙한 것이 되었다. 당시 토탈사커라는 명칭으로 미헬스가 고안한 축구는 모든 선수가 최대한 구분 없이 많은 일에 참여한다는 개념이 더 강했다. 크루이프의 크루이피스타(Cruyffista)는 단순히 크루이프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크루이프의 철학이 축구 전반적으로 강하게 자리잡혔다는 상징적인 방식으로 불리우고 있는 단어다. 크루이프는 선수 시절에도 크루이프턴 (Cruyff Turn) 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술을 세상에 알린 적이 있었지만, 감독으로서도 그가 창시한 공간을 잠식한 점유 축구는 세계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이렇게 개성이 강하고 자신의 철학을 전파하려는 욕심이 강했던 크루이프는 점유라는 개념이 축구계에 화제가 되자,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표현 한 적이 있다.

"우리 선수가 공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 팀은 공이 없이 싸워야 한다. 축구의 기본은 간단해. 공을 만지거나 공을 만질 수 없거나"

그의 철학은 심플했고, 그는 몸을 키우는 개념인 피지컬을 강요하지 않았다. 크루이프의 트레이닝에서 피지컬 세션이란 많이 뛸 수 있는 지구력을 키우는 정도의 내용이었다. 그가 남긴 수많은 명언 중 가장 유명한 '축구는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 이라는 말에 충실하듯, 그의 트레이닝 세션 중 피지컬 분야는 선수가 몸을 경기 내내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는 세트 플레이 훈련 역시 거의 하지 않았다. 당시 빅클럽 거의 다가 세트 플레이 훈련에 몰두하던 시절이었다. 세트 플레이로 쉽게 골을 넣을 수 있다는 세간의 분위기와 다르게 그는 세트 플레이에서 나오는 골이 효율이 없다고 생각하는 주의였고, 이건 그의 철학을 물려 받은 감독 펩 과르디올라가 그 귀중한 코너킥과 프리킥 기회에 많은 빈도로 짧은 패스로 그라운드의 다음 디시전을 구상했던 것으로 뒷받침 된다.

크루이프는 예전 호르헤 발다노와의 TV 대담에서 "왜 3명의 수비수만 세웁니까?" 라는 발다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한다.

"만약 상대팀이 2명의 공격수를 전방에 배치한다고 가정해봐. 그럼 우리가 4명이나 5명의 디펜더를 놓을 필요가 없잖아? 3명이면 충분하지"

어쩌면 크루이프는 이런 누구보다 단순한 이론으로 강한 추진과 실행을 이어간 감독이라고 봐야겠다. 어쨌든 그는 이어서 이런 적은 공간에서, 혹은 열세인 숫자에서도 볼이 순환되고 흘러가려면, 선수들의 볼 컨트롤과 적절한 포지셔닝, 상황에 맞추어 들어가는 압박이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단정지었다. 그래야 많은 선수들이 가장 적게 뛰면서 가장 많이 패스하고 가장 많이 패스하면서 가장 많이 슈팅한다는 그만의 개성적인 이론이 펼쳐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을 구현하기 위하여, 크루이프가 고안한 '론도(Rondo)' 라는 독특한 트레이닝이 탄생한다.

론도의 창시자가 크루이프인가 아닌가에는 많은 설이 존재한다. 그의 트레이닝에 관여한 아약스 스태프가 고안했다는 말도 있고 미헬스가 네덜란드에서 먼저 제안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누가 고안했던 간에 이것을 단순한 트레이닝의 부분이 아닌 핵심적인 사항으로 발전시키고 대중화 시킨 것은 크루이프가 맞다.

 

바르셀로나 트레이닝의 핵심이 된 론도

 

론도의 방식은 생각보다 더 간단하다. 4,5명의 선수가 둘러싸 원을 이루고 중간에 1명의 술래가 들어가 디펜스를 하는 것이 기본적인 뼈대이다. 규칙은 무조건 볼을 돌리는 원형의 선수들은 볼터치가 '1회' 이상 되면 안된다는 것, 건드리고 반대편 발로 또 건드려서 패스하면 반칙이 된다. 만약 중간에 있는 술래가 공을 건드리면 패스를 한 사람이 들어가서 다시 디펜스를 하는 방식이다. 이것을 론도의 '기본 그룹 구성' 이라고 칭한다. 고급 그룹 구성은 7-8명, 여유가 있다면 그보다 조금 더 한 선수의 숫자가 들어가 똑같은 방식으로 패스와 디펜스 훈련을 동시에 실행한다. 최고급 그룹 구성은 12명의 선수가 6:6으로 나누고 그라운드를 길이 12m, 폭 6m 로 그려놓아 선수들은 그 밖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패서와 디펜더가 동일한 숫자이기에 볼을 건드려서만 되지 않고 최종적으로 뺏어야 교체가 가능하다. 코치 둘이 같이 투입되어 패서의 역할을 해주며 실제로는 8:6의 싸움이 된다. 게임은 교체 방식이기 때문에 놔두면 영원히 끝나지 않으며, 15분 정도만 해도 매우 힘든 게임이라고 한다. 기본, 고급, 최고급 이 순차적인 그룹의 구성은 론도 게임으로 정하게 되며 최고급으로 올라올수록 다음 선발 출장에 유력해진다. 단골 손님은 펩 과르디올라, 바케로, 라우드럽, 쿠만, 아모르 등이었다고. 크루이프는 이 방식으로 선수들의 컨디션을 판단하고 다음 경기를 대비했다.

바르셀로나 트레이닝에서 피지컬과 슛, 패스 연습이 없는 날에도 론도는 매일 시행되었다. 크루이프는 이 훈련 방식이 선수들의 모든 것을 키울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공을 뺏는 그룹은 공의 예측력과 상대 선수에게 적시에 압박을 하는 타이밍을 습득하게 된다. 패서들에게는 어느 선수에게 패스를 줘야 하는지에 대한 시야와 볼을 원터치로 정확히 보내는 능력을 키우게 되고 이런 요인들은 크루이프의 전술에 너무나 알맞은 조건이었다. 실제로 크루이프의 트레이닝 중 론도는 약 4분의 3 가량이 시행되었다고 전해진다. 5분의 러닝 이후 바로 시행되었던 론도로 트레이닝이 끝난 적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연속적인 기적

 

라리가 1991-1992 시즌이 시작되었다. 크루이프가 작년 좋지 않은 일을 겪었지만 리가 타이틀을 4년 반만에 가져온 바르셀로나였다. 이번 시즌의 목표는 마드리드를 꺽고 라리가 제패를 하는 것, 그리고 작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일격을 당하여 메이저리그의 밤비노의 저주 급으로 전락한 세계 대회의 트로피 획득이었다. 그러나 첫 출발은 그리 좋지 않았다. B팀의 수비형 미드필더 펩 과르디올라, 중앙 수비수인 후안 카를로스, 세바스티안 에레라를 A팀으로 끌어올려 수비를 구상했지만 어린 선수들이 백업 역할을 하기엔 아직 버거웠던 걸까. 물론 부담감 전에 B팀과는 확연히 다른 압박에 더 수비 조직을 구상하기에 애를 먹었는지도 모른다. 바르셀로나는 크루이프의 네번째 시즌의 첫 리그 5경기에서 3패를 당하고 흔들린다. 5경기에서 9실점은 장기간 부상을 당하고 돌아온 쿠만의 경기 감각하고도 관련이 있었고 크루이프가 드디어 시험대에 올린 유스 시스템의 선수들의 활용 때문이기도 했다. 이 좋지 않은 분위기에 바로 찾아온 6라운드 엘 클라시코 더비. 바르셀로나는 이 시즌 리그 첫 엘 클라시코에 과르디올라를 주전으로 내세워 그가 이제 확고한 4번이 되었음을 세상에 알린다. 재미있는 건 이때 레알 마드리드는 교체 선수로 루이스 엔리케를 투입했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젊은 루쵸는 멀티 플레이어 정도의 개성을 지닌 쓰임새 많은 이미지를 가진 선수였다. 선수로서는 펩이 조금 더 빠르게 우위를 가진 셈. 엘 클라시코는 쿠만이 후반 PK를 꾸역꾸역 넣는 바람에 1-1 지루한 무승부로 마무리 지어졌고, 바로 다음에 펼쳐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어려운 경기를 스토이치코프의 골로 승리하면서 대 반전을 맞이한다. 그 이후 24경기 동안 단 1패를 기록한 바르셀로나는 레알 마드리드에 승점 1점 차이로 바짝 따라붙게 된다.

 

시즌 리그에서 최고의 경기력을 펼쳤던 알바세테와의 리가 31라운드이다. 크루이프의 철학이 잘 보이는 경기였다.

 

그 사이 바르셀로나는 이번 시즌 가장 위대한 여정을 동시에 펼치고 있었다. 바로 챔피언스리그의 전신 유로피안 컵에서의 쾌속 행진이었다. 유로피언 컵은 현재의 챔피언스 리그와 많이 달랐다. 우선 각 대회의 전년도 우승팀끼리 출전해 여름 동안의 예선을 거쳐 32개의 참가 팀을 결정한다. 32개의 팀은 8강까지는 토너먼트 형식으로 경기를 치루며 최종 진출한 8개팀이 다시 4개팀씩 2개의 조로 나뉘어 리그전을 펼치고 각 조의 1위 팀이 결승전을 치루게 되는 지금과는 완전 다른 방식이었다.

 

결국 8강 리그전까지 도달하기 위하여 2번의 라운드에서 승리해야 되었는데, 바르셀로나의 추첨 결과는 두 번의 대결 모두 독일의 클럽이었다. 첫번째 라운드에서 맞붙은 다소 약체로 분류된 한자 로스톡과의 대진에서는 라우드럽의 기가 막힌 활약으로 종합 전적 3-1로 승리하였다. 두번째 라운드는 '카이저슬라우테른' 이었는데 독일 특유의 압박과 피지컬로 바르셀로나를 압박해왔고, 1차전에서 치키의 멀티골 덕에 2-0으로 승리했으나, 2차전 원정 경기에서는 후반 30분까지 내리 3골을 얻어 맞아 종합 전적에서 뒤지고 있던 상황. 이때도 원정 다득점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바르셀로나의 1골이 들어가느냐 마느냐로 나머지 15분이 흘러가고 있었다. 후반 44분,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마지막이라고 해도 좋은 프리킥을 쿠만이 준비하고 있었다. 쿠만은 그동안 세트플레이시 보였던 행동과 달리 상당히 신중하게 머뭇거리다 공을 올려줬고 바케로 앞에는 바케로보다 신장이 우월한 3명의 상대 디펜더가 이미 자리잡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바케로의 머리에 맞은 공은 예술적인 궤적을 그리면서 절묘하게 골로 연결된다. 바르셀로나가 8강 그룹 스테이지에 진출하게 만드는 중요한 골이었다.

 

바케로 본인의 선수 생활에서도 최고의 골이었지만, 이후 몇년동안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회자된 골이기도 하다. 파리 생제르망전 세르지 로베르토의 골이나 첼시전 이니에스타의 골이 터졌을때 까탈루냐의 해설자는 '카이저슬라우테른'을 계속 외쳤는데 아무 의미 없는 메아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카이저슬라우테른전 바케로의 극적 골. 원정 후반 44분에 터졌기 때문에 이니에스타의 골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이니에스타의 첼시전 골 이후 까탈루냐 해설자가 메아리처럼 외치는 소리는 바로 '카이저슬라우테른'이다

 

이후 바르셀로나는 추첨을 통해 벤피카, 스파르타 프라하, 디나모 키예프와 B조에 속하게 된다. 그해 유로피안 컵 득점왕에 오른 세르게이 유란과 브라질 폭격기 이사야의 존재만으로도 공격력이 유럽 최강이라고 평가 받았던 벤피카였지만 바르셀로나는 두번의 경기에서 이 둘을 무득점으로 묶으며 무난하게 1승 1무를 거두었고, 또 다른 경쟁자 스파르타 프라하에게도 신승을 거두며 1승 1패를 거둬, 총합 4승 1무 1패로 넉넉하게 웸블리 결승전으로 향한다. 상대편은 이탈리아의 강호였던 삼프도리아. 감독으로도 활발하게 활동 중인 삼프도리아의 레전드 로베르토 만치니와 폭격기 잔루카 비알리가 팀을 이끌고 있었다.

 

재미있는건 크루이프가 리그에서 보여준 스토이치코프의 탑이 아닌 라우드럽의 탑을 계속 사용했다는 점이다. 공격수가 없이 미드필더에서 조금 더 수비적인 영향을 주기 위하여 바케로와 함께 라우드럽이 번갈아 '펄스 9' 의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이때는 펄스나인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바르셀로나는 이때까지 유로피안 컵 결승에 2번 진출했다. 1956년 창설된 이 대회에서 1961년 스위스에서 열린 벤피카와의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쿠발라, 루이스 수아레스의 레전드 공격라인을 갖추고도 패했고, 1986년 피스후안의 저주라고 아직까지 회자되는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전을 패했다. 이 피스후안의 저주가 곧 크루이프의 감독 영입으로 이어졌으며, 바르셀로나의 이번 결승전은 바르셀로나 팬들의 염원뿐 아니라, 뉴네스 의장이 크루이프를 감독으로 데려온 의미와 이유를 보여주는 한판이 될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와 삼프도리아의 결승전이 치뤄지는 전날, 1992년 5월 19일 화요일 12시에 깜노우 경기장 옆에 200대가 넘는 전세 버스가 줄을 서고 있었다. 영국 중립 지역이었기에,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배정된 티켓은 2만 5천장. 티켓을 랜덤으로 추첨해 티켓을 손에 넣은 사람들은 영국까지 24시간 여행하여 웸블리 스타디움에 도착했다. 경기 1시간 전인 5월 20일 8시. 결승전 스타팅 멤버가 크루이프에 의해 발표됐다. 수비사레타 골키퍼에 난도와 쿠만이 중앙 수비수, 페레르와 카를로스의 양쪽 윙백, 과르디올라 에우제비오의 더블 피보테, 메디아푼다에 바케로, 쓰리톱에 라우드럽, 살리나스, 스토이치코프였다. 역시 크루이프는 고집대로 라우드럽을 톱에 세웠으며, 이번에 본격적으로 올라온 까탈루냐 마시아 출신 과르디올라를 스타팅으로 세운다. 과르디올라를 크루이프가 얼마나 아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경기 내용은 수준이 높았다. 양팀 키퍼의 신들린 선방으로 인하여 골이 좀처럼 터지지 않았지만 양 윙어의 스피디한 전개로 인하여 서로의 빠른 역습과 강력한 슈팅이 오고 갔다. 0-0의 적막속에 연장전에 돌입하고 연장 전반도 별다른 공격적 성과없이 연장 후반을 맞이하고 있었다. 삼프도리아의 간판 비알리가 쿠만에게 8분이 남은 상황에서 파울을 했고 쿠만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프리킥을 결승골로 연결했다. 바르셀로나가 최초로 최고점의 국제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삼프도리아와의 유로피안 컵 결승전 하이라이트. 30년 전인데도 전율이 느껴진다.

 

당시 만치니-비알리는 케인-손흥민 같이 완벽한 파트너라고 불리던 공격 라인이었는데, 비알리는 이때의 충격으로 이적을 하게 되고, 만치니는 팀의 하락세에도 끝까지 삼프도리아에 남아 로맨티스트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 경기가 끝나고 만치니와 비알리가 거의 실신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는데 그들의 역사에 있어서는 안타까운 순간으로 남아있다)

 

우승 직후 개선 행사에서 과르디올라의 모습

 

람블라스 거리에는 수십만명의 사람이 몰려들어 폭죽을 터트렸다. 피에스타(축제)가 이틀간 펼쳐졌으며, 선수들의 바르셀로나 공항 입국 시간에 맞추어 만명 이상의 소시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수들이 산 하이메 광장으로 들어섰고 새파란 신인 과르디올라는 선두에서 외쳤다.

 

"바르셀로나 시민 여러분!!! 우리가 돌아왔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을 한 뒤, 까탈루냐의 총리가 망명 후 입국하여 시민들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전한 것이다. 그가 역사적으로도 까탈루냐의 독립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종종 까탈루냐의 독립을 간접적으로 주장하는 모습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과르디올라의 축구는 까탈루냐의 영광과 맞닿아져 있었고, 그는 이런 기질 때문에 바르셀로나 선수 시절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다. 팬들은 그런 20살밖에 안된 풋내기 과르디올라를 염원하고 사랑했다. 어린 나이지만 과르디올라는 소시오들에게 애국자였으며, 팀의 상징이 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2-3일 간의 피에스타가 끝나고 바르셀로나는 다시 현실로 복귀했다. 아직 리그 경쟁이 레알 마드리드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대 축구사에서 마드리드의 논란의 경질은 2번 있었는데 첫번째는 몇 년 후에 경질 되었던 카펠라 감독이었고, 두번째는 이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를 이끌고 있던 안티치 감독이었다. 13경기 동안 12승 1무라는 훌륭한 성적표를 거두고 있는 감독인데도 불구하고, 마드리드 보드진이 그를 경질한 것이다. 압도적인 1위인데도 그가 경질 된 것은 스펙터클한 축구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이유. 라이벌 바르셀로나를 지극히 의식한 경질이기도 했다. 몇년 후에 안티치는 바르셀로나에서 감독직을 맡기도 했는데 바르셀로나 역시 성적과 관계 없이 그의 축구 스타일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이별했다.

 

37라운드 에스파뇰 전을 이긴 바르셀로나와 1위 레알 마드리드의 승점차는 고작 1점 차이. 바르셀로나는 38라운드 빌바오전을 무조건 이겨야 했고, 더해서 마드리드가 무나 패를 당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둘의 전력차는 예상대로 너무 컷다. 마드리드는 일찌감치 먼저 2골을 넣고 2-0으로 앞서가고 있었다. 바르셀로나 역시 스토이치코프의 멀티골로 승리가 거의 확정되는 분위기. 이런 분위기 속에 기적같은 일이 벌어진다.

 

갑자기 레알 마드리드의 히카르도 로차의 자살골이 들어가고, 골키퍼 부요의 돌이킬수 없는 실수가 나오는 등, 수비진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테네리페의 연속 골을 내주며 2-2 동점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전까지 바르셀로나 깜노우는 이기고 있음에도 침울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소식이 전해지자 갑자기 관중들의 환호성이 떠나지 않았다. 종료가 다가오자 테네리페는 피에르가 추가골을 성공시킴으로서 3-2라는 뜻밖의 승리를 거둔다. (테네리페는 12승 10무 16패로 20개 팀 중 13위로 마감했다) 

 

두번째 피에스타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모든 까탈루냐 지역의 사람들이 나와 먹고 즐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크루이프의 팀은 이때부터 'Dream' 이라고 칭송받았다. 32년만의 리가를 2연패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잠깐씩 리가 컵을 들어올리던 바르셀로나에게 강함과 동시에 희망을 주는 팀이 다가오고 있었다. 앞으로 바르셀로나를 향한 팬들의 기대치가 '우승' 으로 자리잡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시즌 웸블리에서의 유로피안컵 우승은 크루이프에게 영화 같은 스토리와도 같았다. 우승을 하기 정확히 21년 전, 선수로서 크루이프가 이끌던 아약스가 파나시아니코스를 누르고 유로피안컵의 우승컵을 든 장소가 바로 웸블리였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한 시즌이었지만, 멀리 보면 바르셀로나의 현재 영광은 크루이프의 4년차때 시작되었다고 보면 옳다. 결과론적으로 크루이프의 승리, 바르셀로나의 2연패 시즌은 이후 바르셀로나에게 펼쳐지는 영광에 초석이 되었다.

 

 

 

레알 마드리드와 테네리페의 38R 경기 덕분에 바르셀로나는 기적의 역전 우승을 거두었다.

 

 

1991-1992 바르셀로나 베스트 11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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